남영동 열정도 거리를 좋아한다.
용산구 금싸라기 빌딩숲에 둘러싸인 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이곳은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대부분 오래된, 키작은 건물이 오밀조밀 모인 열정도는 지방 소도시 골목 같다. 촬영용 세트장 같기도 하다. 나에게는 때때로 커피 한 잔, 밥 한 끼, 소주나 위스키, 와인과 치즈를 즐기기 좋은 쉼터이기도 하다.
가끔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면 나베집, 얼큰한 맛이 그리우면 낙지집을 들르기도 한다. 이 거리는 비가 올 때면 가장 좋다. 특히 번뜩 생각나는 한 곳이 있다. 거리 중간 즈음, 한두 사람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기름집.' '기름집'이라고 하면 참기름이나 들기름이라도 짜는 곳인가 싶지만 그저 술집이다.
한쪽 공중 구석에 매달린 낡은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은하철도 999가 나온다. 테이블 위에는 은은한 초와 빛바랜 비디오테이프가 하나씩 올려져 있다. 그저 오래된 어느 뒷골목 정든집을 찾을 때의 느낌처럼, 비디오테이프 곽 역시 따스한 햇살 좋은 날이든, 스산한 분위기 감도는 날이든 간에 반드시 만져보고 싶을 만큼 미묘하게 옛 정서를 뿜어내 마음을 자극하는 게 있다. 그것의 반을 따각, 하고 갈라 열면 기름집의 메뉴가 드러난다.
대표적인 파골뱅이나 기름골뱅이, 어묵탕 등이 있는데 난, 소면과 무쳐먹게끔 매콤하니 나오는 골뱅이와는 달리
야트막하고 찌그러진 냄비서 졸인 '기름골뱅이'를 좋아한다. 유리잔에 꽂힌 튀긴 국수를 하나씩 앞니로 끊어먹으며 기름골뱅이를 기다릴 때면 침이 꿀꺽 넘어가곤 한다.
테이블에 기름골뱅이가 안착한다. 감바스처럼 기름에 자작자작 끓인 골뱅이는 담백하고 고소해서 술안주에 그만이다.
허기진 채 이 집을 들른 때는 일단 골뱅이 맛을 보고 바게트 빵을 먹는다. 뭔가 특별하지는 않아도 익숙한 식감과 아는 맛을 곱씹는 시간은 안정을 느끼는데 그만이라는 걸 새삼 느끼곤 한다.
장마철이다.
비가 하염없이 내린 며칠 동안 이 집 골뱅이가 무척 생각났다. 이 사장이 오랜 서울 생활을 청산하기 바로 전인 올해 초였나. 그때 함께 한 이후 혼자 갈 자신이 없어서 생각만 했던 곳. 마침 터진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인해 이곳의 '골뱅이에 소주'는 머릿속에서만 삼킨다.
그 겨울 광화문 다녀온 뒤 들르곤 하던 기름집에서의 골뱅이와 어묵탕... 좋은 기억에서 남는 건 언제나 그리운 여운인가보다. 언제 다시 그 자리에 앉아 너, 나, 우리, 나라를 주절주절 이야기할까.
비가 또 온단다. 한기를 녹이며 먹던 소주와 기름골뱅이를 상상으로나마 다시 삼키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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