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의 얘기다.
장마철 게릴라성 호우가 계속되던 시기, 아침 일찍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학교 정문까지 가는 길은 10여분 정도 걸어야만 다다르는 거리였다. 편도 1차로 옆의 좁다란 인도를 걷던 나는 무거운 책가방의 부담을 어깨에 짊어진 데다 양 손에는 우산을 든 채 이곳저곳에 들치는 비바람을 막느라 온 정신을 집중했다. 차들은 쌩쌩 달렸고, 먹장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서는 비가 그칠 줄 몰랐다.
학교 정문이 저 멀리 보였다. 흐린 날이라 비록 불편함이 있었지만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거의 다 왔구나.
순간, 촤아악!
순식간에 그 무언가가 나의 안도를 씹어 삼켰다. 오른편에서 엄청난 물보라가 일더니 내 교복 전체에 구정물을 끼얹은 것이다.
우산으로 얼른 막을 새도 없이 자동차 타이어 바퀴가 일으킨 파장은 충격이었다. 거의 얼굴만 피했다 뿐이지 전신에 오염물이 튄 셈이었다. 놀람과 당황스러움이 금세 얼굴에 퍼졌다. 축축하고 누리티티하게 오염된 교복을 내려다보며 난 턱이라도 빠진 듯 쉽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승용차 한 대가 그 요동의 현장을 뒤로한 채 멀어지고 있었다.
아....
탄식과 함께 내 미간은 일그러졌고, 우뚝 선 걸음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버스를 다시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우스운 발상이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 때였고, 웬만한 아픔쯤은 참거나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면 그것을 뒤로한 채 학교 가는 게 당연한 때였다.
그런데 마음이 다친 건 어떻게 한다니. 속상하고 화났다가 어이가 없는 걸... 교실에 들어가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를 어쩌나...
여전히 구겨진 마음은 펴질 줄 모른 채 거침없는 마음의 욕 역시 미간에 바짝 달려있었다. 유유히 달려 나가는 어른이라 붙잡을 수도 없었던 때, 조심조심 걷다 빗물에 쫄딱 망쳐버린 소녀의 하루... 과연 그는 기억이나 할까.
아마 지금의 내가 어른이 아닌 소녀였다면 그냥 있지는 않았을 거다. 도로교통법에 물 튀김을 유발하는 운전자나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것과 관련한 법 조항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운전자는 빗길 주행 시 움푹 파인 곳에 물이 고여 있는지 주의하며 주행해야 한다. 즉, 물웅덩이나 갑자기 불어난 물에 침수된 도로를 지날 때는 보행자에게 물을 튀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최대 20만 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과태료는 최대 20만 원이기 때문에 이보다 적게 부과될 가능성이 많다. 대개 승합차의 경우에는 2만 원, 승용차와 이륜차의 경우 1만 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운전자의 주행으로 물이나 오염물이 튀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세탁이나 수선비를 물어주는 경우라면 과태료 플러스알파가 되는 셈이다.
빗길 운전에서는 어쨌거나 보행자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되며 그 책임은 모두 운전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는 '뚜벅이 소녀'에서 '빠방이 모는 어른'이 된 나 역시 이런 주의 의무를 상기하며 운전해야겠다.
만약, 보행하다 차량이 튀긴 물로 피해를 입은 자는 일시와 장소, 차종과 번호, 차량 운행 방향 등 구체적인 정보를 기억 또는 기록하였다가 경찰에게 신고하여 해당 운전자에게 피해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물론 피해보상은 법적 기준선이 없기 때문에 운전자와 피해자 간에 적절한 피해보상금을 합의하면 된다.
오늘 서울 하늘에 비가 내린다. 많은 비를 내리고도 여전히 기나긴 장마 꼬리를 보지 못한 건 장마가 아니라 기후 변화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구의 건강 없이 인간의 건강이 유지될 리는 없다. 한 치 안으로만 내다보곤 하는 인간의 습성 때문일까.
먼 미래보다 당장 이 비로 인해 수해 지역의 복구작업에 지장이 생기지 않기를, 거센 물살에 소와 개, 돼지가 타지로, 무인도로 떠밀려가지 않기를, 지붕 위로 올라가 물빠진 뭍으로도 내려오는 게 큰 일이 돼버린 가축이 또 생겨나지 않기를, 사람과 동물, 주변 모두를 이웃한 인간의 시름이 이 비로 인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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