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맛

보리수나무 열매와 검정에 관한 이야기

돌풀 2020. 6. 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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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면허를 탈출하기 위해 도로에 나선 지 한 달여.

이제는 후진연습이야!

 한산한 장소가 필요했다아버지는 얼마 전 한 시골 마을로 운전연습 코스를 정해주셨다늘 처음이 두려운 법이지. 하지만 난 할 수 있다초조한 마음을 몇 번의 심호흡으로 가다듬었다사이드미러 양쪽을 잘 봐가며 룸미러와 후방카메라 액정까지 잘 확인하면서 천천히 연습했다.

 

시골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뒤로 뒤로좁은 길을 따라 뒤로 뒤로어라? 하다 보니 그리 어렵지는 않구나후진감이 그리 떨어지지는 않는 모양

 

하긴 첫 후진주차부터 주차장 내 구역에 한 번에 쑥쑥 잘 집어넣었더랬다.

한 시간 정도 거듭되는 연습을 한 뒤 아버지는 어느 산책로 입구에 차를 멈추게 하셨다.

 

파리똥 먹어봐라.”

 

파리똥을?! 요즘 옆 사람 얘기를 잘 못 듣긴 했는데... (집음 능력이 뛰어나서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어) ㅎㅎㅎ

 

 

 

 

파리똥이 아닌 보리똥이었단다. 정확하게는 보리수나무 열매다.

 빨갛고 노란, 초록색의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자태가 곱고 아름다웠다어린 시절 시골에 살았을 때 가끔씩 빨갛게 익은 열매를 따 먹었었다그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이 동시에 터지는 게 신기했는데... 입안에서 우물우물 씨를 골라내 툭 뱉고는 했었다나무 전체에서 단내가 많이 났다. 벌이 맴돌았다. 이 집이 맛집인 걸 안 거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잘 익은 열매를 따려고 손을 뻗었다.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초록 열매 표면에 검정이 보였다. 노란 열매에도 검정이 보였다. 빨간 열매에도 검정이 보였다멀리서 봤을 때는 초록이고 빨갛고 노랗던 열매의 얼굴들주근깨처럼 어둡고 자잘한 점들이 많은 그것을 우리는 점이 많은 초록, 점이 많은 노랑, 점이 많은 빨강이라고 하지는 않는다그저 초록 열매, 노란 열매, 빨간 열매라고 한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 검정에 관하여

 지난 달 25,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비무장 상태의 흑인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무릎 밑에 깔려서 사망했다수분 째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하던 흑인은 결국 죽고 말았다. 사건지역 미니애폴리스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진 상태다

 

오래된 인종차별의 그늘에서 핍박받던 사람들, 그들이 받은 차별을 이해하고 연대하는 이웃들. 난 그 끔찍한 사건 앞에서 정의와 상식을 구현하겠다며, 모두를 존엄성을 지닌 똑같은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연대 현장을 의미 있게 보고 있다. 또한 응원한다.

보리수나무 열매를 물끄러미 보았다초록이 검정보고 다르다고 한다면 제 몸의 검정은 무엇이라 할 것인가노랑이 검정보고 이질적이라고 한다면 제 몸의 검정은 무엇이라 할 것인가빨강이 검정보고 틀렸다고 한다면 제 몸의 검정은 무엇이라 할 것인가유심히 보면, 빨간 열매에는 하얀 점이 유독 많았다하얘도 빨강이라 불리는 건 어떻게 할 거냐고그 색이 대체적이라서? 그렇다고 있는 먹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까망이 섞여도 초록이다까망이 섞여도 노랑이며 까망이 섞여도 빨강이라 부르는 보편적 사고를 한다. 그 크기나 면적이 다를 뿐 사실은 모든 색이 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검다고 차별과 지탄받는 존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누군가를 억누르고 짓밟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마음, 죄의식이 결여된 폭력과 횡포야 말로 지탄받아야 할 어둠이다. 공권력의 정당성을 방패삼는 오만한 자아, 국민들의 날선 비판에도 공감능력 대신 공격성향을 키우는 자들의 비인간적인 태도야말로 존재 가치가 없는 흑(黑)뿐이다.

 

보리수열매를 먹었다내 어린 시절 역사를 품은 열매가 입안에서 톡 터졌다. 달고 쓰고 정감어린 맛. 좋구나돌아가는 건 아름다운 게 있을 때 의미 있는 것이다그러니 역사는 돌아보되 장롱 속 과오를 답습하지는 말아야 한다.

 

경찰폭력과 인종차별이라니... 후진할 게 따로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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